현 시대의 팝을 엄청난 수준으로 이끌어낸 팝의 제왕 마이클 잭슨이 갑작스레 떠나버렷습니다
실감도 잘 나질않고 허무하네요 이번에 재기한다는 소식 들엇는데 이렇게 가버리다니요...
전 세계가 그의 팬이엇고 전 세계가 그의 무대 엿는데 슬프다기보다 충격적이네요
위대한 음악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루머 없는 좋은 곧에서 푹 쉬길 rest in peace MJ.!
마이클 잭슨의 자서전 'moonwalker' 에서 발췌한 유년 시절 이야기를 조금 넣어봣습니다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는 줄곧 생각해 왔다.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이야기를 말이다.
난롯가에 앉아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경을 연상시키거나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알기 쉬운 말로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왔다.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위대한 작가들이란 자기한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따금 그런 것을 나도 할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이 책에서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이야기이다.
어떤 의미로는 노래를 창작하는 경우도 같은 방법으로 감정의 기복을 창조해 나간다.
하지만 이야기란 스케치이다. 수은처럼 잡기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며 즐기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요령에 대해서 쓰여진 책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다.
이 책은, 무대 의상으로 차려입지도 않았고 화장을 한 것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바로 나 자신, 나의 목소리이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 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어딘가로 데리고 갈 수 있거나
모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갓 데뷔한 잭슨 5 시절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에
언제나 대답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다.
우리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므로 정말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
각자 호화로운 생애를 쌓기 시작하겠지만, 알다시피 나의 경우는 달랐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겨우 다섯 살에 불과했으니까.
가령당신이 홍행사업에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린이였다고 해도
자기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일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의 인생에 관한 대부분의 일이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결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란 이런 정도다.
목청껏 노래하고 정말 기쁜 마음으로 춤추는, 어린이로서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다.
물론 사소한 일은 전혀 기억에 없다. 내가 겨우 여덟 살인가 아홉 살 이었을때
잭슨 5가 정말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1958년 늦여름의 어느 날 밤에 9남매 중 일곱 번째 아이로,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 잭슨은 아칸소 주에서 태어나, 1949년 앨라배마 주 출신의 어머니 캐서린 스크루즈와 결혼했다.
누나 모린이 태어난것은 양친이 결혼한 이듬해로, 나중에 그녀는 장녀로서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재키, 티토, 저메인, 라토야, 그리고 말론이 잇달아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뒤에 랜디와 자넷이 태어났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의 하나는 제철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마음까지 마비되어버릴 정도로 고된 일이었으므로,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헤어나려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무렵,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있었고 또한 어머니도 음악을 아주 좋아했던 탓으로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음악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 숙부는 지방에서 팔콘즈라는 이름의 R&B 악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두분 다 기타를 쳤다.
그들은 척베리, 리틀 리처드, 오티스 레딩 등 유명 음악가들의
초기의 훌륭한 로큰롤과 블루스 곡을 곧잘 연주하곤 하였다.
비록 그 무렵의 우리는 너무 어려서 알지 못했지만, 그 곡들은 모두 놀랄 만큼 훌륭한 것이어서
한곡 한곡이 아버지 조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팔콘즈는 게리에 있었던 우리 집 거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R&B를 듣고 자랐던 것이다. 우리는 9남매였고 숙부에게도
8남매의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함께 모이면 대가족이 되었다.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은 음악이었으므로, 그런 식으로 보내는 시간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고
아버지는 우리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잭슨즈가 되는 잭슨5는 이러한 토양에서 태어났다.
내가 혼자서 일어서고 나 자신의 사운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의 연습과 음악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나는 노래하기를 퍽 좋아했지만, 어렸을 때의 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일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디 갈랜드 처럼 부모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 비즈니스에 끌려 들어온 것은 아니다.
음악업계에서 일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즐거웠고,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부모나 가족에게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음악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분명히 해 두겠지만,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놓자마자 스튜디오로 가야만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어린이라면 벌써
잠자리에 들 시간이 훨씬 지난 밤 늦게까지 나는 실제로 노래하곤 했었다.
모타운 스튜디오 길 건너편에는 공원이 있어서
나는 곧잘 거기서 놀고 있는아이들을 바라 보았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그렇게 즐겁게 놀 수 있는 생활을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었으므로
눈을 휘동그렇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저런 자유가 있어서 이대로 나가서 그들과 같은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어린 시절에는 꽤나 슬픈 순간들이었다.
어린이 스타란 누구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 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에게 말해 준 일도 있다.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을 하고 있으면, 세상이란 지독하게 불공평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중뿔나게 으뜸가는 꼬마 가수마이클이 되도록 강요된 것도 아니고
내가 그것을 좋아하여 한 것이지만 그것은 역시 힘드는 일이었다.
예컨대, 앨범 제작에 착수하고 있으면 학교가 끝나자마자 스튜디오로 뛰어가야 했고
더구나 간단한 식사조차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따금 그런 시간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오면 11시나 12시가 되어 이미 취침 시간이 지나있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배운 것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는 것이였다.
나는 내가 어딘지 늙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정말로 내가 노인처럼 많은것을 보아 왔고
경험해 온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줄곧 일해 왔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겨우 스물아홉 살 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 비지니스에 들어온 지 24년이나 된다.
때로는 벌써 내 인생은 마지막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등을 토닥거려 주는 여든살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듣다.
그것이 모두 내가 너무 어려서 데뷔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형제들과 함께 연주했을 때 우리는 잭슨즈라는 이름으로 알려서 있었다.
잭슨5가 된것은 그후의 일이다.
저 나중에 *모타운을 떠난후에 우리는 잭슨즈라는 이름을 다시 쓰게 된다.
우리들끼리만 활동하고 우리 자신의 음악을 제작하기 시작하고부터는
나의 앨범도 그룹의 앨범도 모두 어머니 캐서린에게 바쳐져 왔다.
어머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나를 팔에 안고
"유 아 마이 선샤인(YOU ARE MY SUNSHINE)"과 "커튼 필즈(COTTON FIELDS)"
같은 노래를 불러 준 일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남매들에게 자주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녀는 인디애나 주에 잠시 산 일이 있었지만 자라난 곳은 앨라배나 주였다.
그 지방에서는 흑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컨트리&웨스턴을 들으며 자라는 것은
교회에서 흑인 영가를 듣는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까지도 윌리 넬슨을 좋아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나는 나의 가창력은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물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머니는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다룰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리비라고 부르는 큰누나 모린에게 그것들을 가르치고,
또 다른 누나 라토야에게도 똑같이 가르쳤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사랑하는 음악을 남의 앞에서
연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능이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고 어렸을 때에 소아마비를 앓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병을 극복했지만, 걸을 때에 끝내 다리를 절게 되었다.
어렸을 때 학교를 꽤 많이 쉬어야 했다는데, 이 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던 시대였으므로
나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그녀는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가 소아마비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는 날이
그녀에겐 얼마나 깊은 뜻을가지고 있었는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유스 센터에서의 쇼를 취소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우리 가정에서는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병이 저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이겨내야 할 시련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나의 속에 주입시켜 주었다.
나는 그 사랑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노래와 춤의 재능은 아름다운 석양이나,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눈을 남기는 폭풍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모든 시간을 리허설이나 이동에 소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시간을 내어 대게 리비와 라토야와 함께 나를 **킹덤 홀로 데려가 주었다.
*베리 고디가 1958년에 디토로이트에 설립한 흑인 전문의 레코드 회사. 디트로이트가 "자동차의 도시"(모타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
**여호와의 증인의 대교회
게리를 떠나 몇년 후에 우리는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슬라이&패밀리 스톤을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한 일요일 밤에 버라이어티 쇼인 "에드설리번 쇼"에 출연했다.
쇼가 끝나자 설리번씨가 인사말을 하러 와서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해 주었다.
나는 쇼 전에 그가 나에게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펩시의 커머셜에 나오는 아이처럼 무대 뒤를 걸어다니고 있다가 설리번씨에게 부딪쳐 버렸던 것이다.
나라는 것을 알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손을 잡았는데, 그 손을 놓기 전에 특별한 메세지를 주었다.
그것은 1970년, 록계의 위대한 예능인들의 몇 사람이 마약과 알코올로 목숨을 잃고 있던 해였다.
쇼 홍행업계의 원로급의 현명한 사람들은 그 너무나도 젊은 죽음에 허를 찔렸다.
나를 보고, 1950년대에 역시 그런식으로 목숨을 잃은 위대한 젊은 가수
프랭키 라이먼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설리번씨는 나에게 이야기했을 때, 이러한 여러가지 일들을 머리속에 생각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 재능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 네 재능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이니까"
그의 친절에 감사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머니의 몸은 소아마비로 부자유했으니까
설리번씨가 말해 준것과 같은 이야기는 전부터 줄곧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것은 댄서로선 생각만 해도 무서운 병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와 우리 남매들을 다른 모양으로 시험하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가족인데도 아주 작은 집에 살며,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했던 일.
우리가 리허설을 하고 있는 동안 네까짓 것들은 절대로 성공 못한다고 소리 치면서
질투하여 우리 집 창문에 돌팔매질을 하던 이웃 아이들.
어머니와 우리의 초기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돈과 명성과 상 이상의 보상을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무언가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알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한 용기를 북돋아 주곤 하였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 배우에 흥미를 가졌다고 하면
그녀는 유명스타에 관한 책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곤 하였다.
아이가 아홉이나 있었지만, 그녀는 한사람 한사람에 대하여 마치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대하듯 하였다.
우리는 아무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이었고 또 얼마나 가족을 위해서 헌신해 주었는가를 결코 잊지 못한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누구나 자기의 어머니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우리 잭슨 남매들도 그런 마음에 변함이 없다.
어머니 캐서린의 상냥함, 따뜻함, 그리고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없이 자랐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로선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이들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의 하나는, 만일 그들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 조부모나 아무한테나 달라붙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머니 이외의 사람을 찾을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친절한 마음, 사랑, 그리고 남들에 대한 이해심이 그녀의 교훈의 리스트에서는 맨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우리 집에서는 죄악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우리에게 주기를 원했고, 우리에게 부탁하거나 조르는 일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그녀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는 일화가 있다.
게리에 살고 있던, 내가 정말 어렸을 때의 어느 이른 아침에,
문이란 문을 모조리 노크하고 다닌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주 심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으므로,
시내의 치안 상태가 좋지 않은 구역에서 온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집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와서 탕탕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즉시 그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이 우리 어머니이다. 내가 일어나 보니 바닥에 피가 묻혀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하면,
제철공장으로부터의 퇴근길에,우리 모두를 위해서 커다란 봉지 가득히 반들반들한 도넛을 사다 준 일이다.
형들도 나도 그 무렵은 정말로 식성이 좋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도넛이 없어지곤 하였다.
아버지는 곧잘 공원에 있는 회전목마에도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가곤 했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일은 별로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겐 신비에 싸인 존재였는데, 아버지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내가 몹시 후회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의 하나는 아버지와 진정한 의미로 친숙해질 수 없었던 일이다.
그는 몇 해 동안이나 자신의 껍질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패밀리 비즈니스에 말참견을 하지 않게 되고부터 우리와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족과 함께 있으면 그는 말 없이 방을 나가 버린다.
오늘까지도 아버지가 너무 쩔쩔매기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란 것이 거북스러운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나도 난처해진다.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었는데,
그것은 이만저만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누군가에 속지 않도록 늘 확인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잘못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는 언제나 자기 가족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아버지가 우리를 도와서 이룩해 준 것은 대개 훌륭하고 다시 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특히 음악업계의 회사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우리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돈이니 부동산이니
그밖의 투자 따위의 현실적인 비즈니스의 세계의 일로 골치를 썩이는 일없이
음악에만 전념하여 올 수 있었던 소수의 행복한 연예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우리를 위하여 도맡아 관리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나 아버지를 위해서도 이익이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
어린이 스타의 정말로 많은 부모들과는 달리 아버지가 우리의 돈을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오늘까지 와 준 것을 아주 감사하고 있다. 자신의 자식들로부터 훔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라.
아버지는 그런 짓을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를 몹시 이해하고 싶어하는 아들로선 슬픈 일이다.
그는 아직도 나에겐 신비스런 존재이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성경에는 심은 곡식은 거둔다고 되어 있지만,
내가 아버지로부터 얻은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나의 매니저 노릇을 하고 있던 무렵, 아버지는 다른 방법으로 말했지만, 뜻은 명백했다.
"너는 이 세상의 재능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어. 하지만 잘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게 되는거야."
아버지 조 잭슨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노래와 음악을 사랑했지만,
눈 앞에있는 *잭슨 거리의 저편에 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의 악단인 팔콘즈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단원들은 주말이면 곧잘 예행 연습을 하러 우리 집에 왔다.
음악 덕분에 그들은 아버지가 기중기를 조종하고 있던
제철공장의 고된 일로부터 정신적으로 헤어날 수가 있었다.
팔콘즈는 시내 도처에서 연주했고, 인디애나 주의 북부와 시카고의 클럽과 대학에서도 연주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 예행 연습을 할 때 아버지는 벽장에서 기타를 꺼내와서 지하실보관해 두었던 앰프에 꽂는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리듬&블루스를 사랑하고 있어서,
기타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의 자랑 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했다.
기타를 넣어 두었던 벽장은 거의 성지와 같이 중요시 되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아이들은 출입금지였다.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대교회에 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살고있던 지역에서는 불량배들이 형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친구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음악이야말로 가족을 결속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부모님이 다 알고 있었다.
세 형들은 팔콘즈 단원들이 집에 와서 연주할 때는 언제나 그 곁에 있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형들에게 팔콘즈의 연주를 듣도록 허용하는 것은
특별히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했지만, 아버지로서도 형들이 그 자리에 있기를 정말로 바라고 있었다.
티토는 연주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기타의 코드를 누르고 아버지가 연주하는 리프(반복악절)를 본뜰 만큼 컸다.
그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티토는 아버지를 쏙 닮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재능을 그가 이어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닮은 데가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티토고 열심인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없을 때는 아무도 기타를 만지지 말 것.이상" 이란 포고가 우리들 전원에게 내려졌다.
그래서, 재키와 티토와 저메인은 어머니가 부엌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기타를 빌렸다.
그들은 기타를 옮길 때도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들이 방으로 돌아오면 라디오를 틀거나 작은 휴대용 레코드 플레이어에 맞추거나하여 연주하곤 했다.
티토는 침대에 앉아서 기타를 배 위에 올려 놓고 그것을 받치면서 쳤고, 재키와 저메인도 교대로 쳤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들은 "그린 어니언즈(GREEN NIONS)"의 파트는
어떻게 치면 되는 것인가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스케일도 연습했다.
그 무렵에는 나도 충분히 자랐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만하면
몰래 참가하여 그들의 연주를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드디어 어머니한테 들키고 말았다.
우리는 모두 야단을 맞을까봐 흠칫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꾸짖었지만, 기타를 조심스럽게 다루기만 한다면 아버지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타가 있으면 형들이 불량배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거나 매를 맞는 일도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손이 닿는 범위에 형들을 놓아둘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것을
일부러 빼앗아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물론, 대가는 조만간 치러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기타의 줄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형들은 몹시 허둥댔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고칠시간은 없었고, 게다가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형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기타를 그대로 벽장 속에 도로 갖다 놓고
아버지가 줄이 저절로 끊어진 것으로 여겨 주도록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저절로 끊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노발대발하였다.
누나들은 나에게 "방에서 나가 있거라. 눈앞에 얼씬도 하지마" 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줄이 끊어진 기타를 발견한 뒤 티토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티토가 침대에서 울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와서 일어나라고 했다.
티토는 겁을 먹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좋아하는 기타를 들고 말없이 거기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무섭고 날카로운 시선을 티토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칠 수 있는지 내게 보여 봐라."
티토는 기운을 되찾아 자신이 익힌 악절을 몇 군데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티토가 아주 잘 칠 수 있는 것을 알고, 티토는 분명히 연습을 쌓아 왔고,
게다가 그와 다른 형제들도 기타를 마치 장난감처럼 다루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줄이 끊어진 것은 단순한 우발사고였음이 아버지에겐 분명해졌다.
마침 그때에 어머니가 들어와서, 이 아이들의 음악적 재능은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겐 재능이 있으니까 그 연주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계속해서 권했으므로, 어느 날 아버지는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연주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티토와 재키와 저메인은 함께 아주 열심히 연습을 시작했다.
2년 후,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나에겐 노래의 재능이 있고,
봉고도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해서 그룹의 멤버가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집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차츰 그는 팔콘즈보다도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을 뿐인데 아버지가 기타 치는 법과 테크닉을 가르쳐 주었다.
말론과 나는 아직 어려서 기타는 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형들에게 쳐서 들려 줄 때에는 주의해서 보았다.
우리는 보면서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기타를 사용하지 말라는 금지령이 그때까지도 지켜지고 있었지만,
사용할 수 있을 때는 형들은 크게 기뻐하며 기타를 쳤다.
잭슨거리의 집은 음악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돈을 내어 레슨을 받게 해 왔기 때문에 레비와 재키에겐 확고한 기초가 있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기초라고 해도 게리의 학교에서 받은 음악 수업과 밴드부에 들어 있었던 정도의 것이었지만, 아무리 많이 연습해도 모자랄 만큼 정력만은 충분했다.
*잭슨의 집이 있었던 거리의 이름이 우연히도 "잭슨 거리"였다
팔콘즈는 그 무렵에도 돈을 벌고는 있었지만, 밤무대 출연의 횟수는 줄고 있었다.
팔콘즈의 연주로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은 우리집으로선 꽤 귀중한 것이였다.
성장기 어린이만이었던 당시의 우리 집 경제 상태는 식량을 사는 것은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었지만,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우리한테 사 줄만한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시어즈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고
아버지 또한 제철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끼니를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무렵 우리는 아주 막다른 곳까지 와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의 귀가가 늦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집에 닿기까지는, 어머니는 언제든지 호된 잔소리를 퍼부을 태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잔소리를 들어도 차려 놓은 밥을 다 먹어 치우는 것처럼
그것을 슬쩍 피할 힘이 아버지에게 있었으므로 우리는 보고 있어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문에서 고개를 쑥 내밀고, 장난꾸러기 아이같은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는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벽장 속에 있는 것보다 약간 작은,
타는 듯이 빨간 기타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움찔 놀랐다.
이제 헌 것은 우리의 것이 된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 기타는 티토의 것이야" 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연습하고 싶어하는 다른 형제에게도 빌려줘야한다고 아버지가 티토에게 말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새 키타 둘레에 모여 참 멋지다고 감탄했다.
우리는 그 기타를 학교에 가지고 가서 그것을 과시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매우 뜻있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또 이날은 잭슨 가족에겐 기념할 만한 날이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서 아주 기뻐했지만, 또한 자기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다.
우리들 이상으로 아버지가 생각하고 있는 커다란 야망과 계획을 어머니는 알아차린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다 잠든 후에 곧잘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가 가지고 있던 꿈은 기타하나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곧 우리는 선물 이외의 악기들도 다루게 되었다.
저메인은 베이스와 앰프를 입수했다.
재키에겐 셰이커가 있었다.
그들의 침실과 거실은 악기점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따금 어머니와 아버지가 돈 문제로 싸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악기와 부속품을 살 돈은 우리의 얼마 안 되는 용돈과는 별도로
매주 생활비를 충당할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에겐 어머니를 설득할 힘이 있었고,
게다가 그녀가 하는 말은 무엇이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유수의 백화점
우리 집에는 마이크로폰까지도 몇 개가 있었다. 그 무렵 정말로 사치품처럼 여겨졌다.
특히 적은 예산으로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 어머니에겐 특별했을 것이다.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열리는 여러 콘테스트에서 존지즈를 비롯한
다른 라이벌들에게 지지 않기 위한 목적만으로 집에 마이크를 갖춘 것이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
마이크는 우리가 준비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집에서는 대개 훌륭한 노랫소리를 내고 있을 텐데,
마이크 앞에 서는 순간 제대로 입도 열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탤런트 소에서 여럿 보았다.
마이크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쳐대듯이 노래하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겐 우리와 같은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리한 점이 없었던 것이다.
마이크를 잘 구사하여 다른 팀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우리를 시기한 사람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유시간, 학교의 공부, 친구들 따위의 많은 것을 희생해 왔으니까, 아무도 시샘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더욱더 잘하게 되었다.
우리보다는 갑절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처럼 연습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봉고 드럼에 말론을 넣은 형들의 연습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는 *트랩드럼과 오르간을 연주하는 조니 잭슨과
랜디 랜시퍼라는 이름의 소년을 데려왔다.
모타운 레코드는 나중에 그들이 우리의 사촌이라고 발표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대가족처럼 보이고 싶었던 PR 담당자들이 꾸며낸 말이었다.
그야 어쨌든 우리는 진짜 악단이 된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을 지켜보면서 마치 스펀지처럼 되도록 많은 것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형들이 연습을 할때도, 채리티 이벤츠나 쇼핑 센터에서 연주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정말 열중했다.
특히 저메인은 그때에 이미 가수였고 큰형이었기 때문에 그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매료되었다.
나를 유치원까지 데려다 준 것도, 그리고 퇴물림옷을 물려준 것도 저메인이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하면 나는 그것을 흉내내려고 했다. 흉내를 잘내면 형들과 아버지는 웃었지만,
내가 노래하기 시작했을 때는 모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 무렵의 나는 아기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그저 소리를 흉내내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 가사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노래를 하면 할수록 점점 잘 부르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춤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곧잘 말론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곤 하였다.
왜냐하면, 저메인은 커다란 베이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론은 나보다 한 살을 더 먹었을 뿐이어서
그에게라면 뒤떨어지지 않고 따라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장에서 형들의 악단이 연주할 때, 함께 참가할 수 있도록 집에서의 연습에서는 내가 거의 노래하게 되었다. 리허설을 통하여 전원이 제각기 악단원으로서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되어서,
담당 파트의 교체는 자연스럽게 행하여졌다.
게리의 우리 집은 작아서 방은 실제로 세 개 밖에 없었지만, 그 무렵의 나에겐 훨씬 커 보였다.
어렸을 때에는 세계가 정말 거대하게 보이는 법이여서 작은 방도 실제 크기의 4배 가량으로 비친다.
여러 해 뒤에 게리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모두 그집이 작은데 새삼 놀랐다.
내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던 집은 현관에서부터 다섯 발짝만 걸으면 뒤란에 닿아버리는 것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차고만큼의 크기도 안 됐지만,
거기에 살고 있던 무렵은 아이들인 우리에게 쾌적하게 여겨졌다.
어렸을 때는 이렇게도 물건을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게리 시절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유치원에 가게 된첫날, 유치원 앞에서 차에서 내려진 것은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몹시 싫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나를 놔두고 가버리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그런 곳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자 나는 유치원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특히 여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상냥했고,
특히 나를 귀여워해주었다. 그 선생님들은 정말 훌륭했다.
내가 어느 학년에서 위 학년으로 진급하게 되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꼭 껴안고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홀딱 빠져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보석을 훔쳐서 선물한 일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퍽 기뻐해 주었지만, 결국 어머니가 그 일을 알게 되어
어머니의 물건으로 인심을 쓰는 일도 끝장이 났다.
하지만, 내가 받은 애정의 보답으로 그녀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만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것도 선생님들이나 학교를 크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1학년의 어느 날, 나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실시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각 학급의 전원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나는 집에 돌아가 부모님과 의논했다.
그리하여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사운드 오브 뮤직"속에 나오는
"클라임 에브리 마운틴 CLIMB EVERY MOUNTAIN)"을 노래 하기도 하였다.
노래를 다부르고 나자 듣고 있던 모두의 반응에 압도되었다.
박수는 열렬했고 모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일어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울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모두를 행복한 기분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굉장한 감정이었는데, 나도 조금은 어리둥절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특별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밤 집에서 노래하듯이 노래했을 뿐이다.
남의 앞에서 노래할 때는 자기가 어떻게 노래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입을 열어 노래할 뿐이니까.
그 후 얼마 안 있어 아버지는 우리에게 탤런트 콘테스트 용의 특별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훌륭한 코치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며 우리와 지냈다.
재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만, 아버지는 그 재능을 어떻게 연마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쇼 비즈니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직감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음악연주를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기에 쏟아 넣었다.
학교가 끝나면 매일 집에서 우리와 아버지는 함께 앉아 연습을 시작하곤 했다.
우리가 연주하면 아버지는 비평한다.
연주를 엉망으로 하면 매를 맞았는데, 허리띠일 때도 있었고 회초리일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에 대해서 정말 엄했다.
언제나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말론이었다. 반면에, 나는 대개 리허설 이외의 일로 매를 맞았다.
아버지는 자주 나를 화나게 하고 상하게 했기 때문에 그것에 반항하여 더 얻어맞았다.
신을 벗어 아버지한테 던진 일도 있었고 주먹을 휘둘러 때리려고 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형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매를 맞게 되었다.
내가 저항하면 아버지는 나를 지독히도 심하게 혼내주곤 했다.
어머니의 말로는, 내가 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덤벼들었다고 하지만, 나에겐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달아나려고 식탁 밑을 뛰어다녀 아버지를 더욱 화나게 한 일이다.
우리는 불온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리허설만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리허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 밤 늦게 게임을 하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시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숨바꼭질이나 줄넘기나 그런 정도의 것이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형들과 함께 뛰어들어간 것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때에 리허설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큰 소동이 벌어지곤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 어머니는 아주 협조적이었다.
우리의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그녀였고, 우리에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리려고 하였다.
그녀의 사랑과 훌륭한 인간성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의 지위까지 다다를 수가 있었을지 좀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는 우리에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과 장시간 리허설만을 계속하는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최고의 연예인이 되고 싶었고, 또한 정말로 음악을 사랑했던 것이다
게리에서는 음악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독자적인 라디오 방송국도 나이트클럽도 있어서 거기에 출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부족한 법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리허설을 끝내고 나면, 아버지는 그 지방의 쇼를 보러 가거나,
멀리 시카고까지 차를 몰고 쇼를 보러 가는 일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데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에 눈을 번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자기가 보고 온 것과 누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우리가 출전할 수 있는 콘테스트를 운영하고 있는 이 지방의 극장에 대해서,
또는 우리에게 알맞을지도 모를 의상에 대해서,
또는 *카발케이드 쇼의 동향 따위, 아무튼 이런 유의 최신 정보에는 모조리 전통해 있었다.
일요일에 대예배당에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때도 있었지만,
내가 집 안으로 뛰어들자마자 전날 밤에 보고 온 쇼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곤 하였다.
이 스텝을 밟아 보기만 하면, 나도 틀림없이 제임스 브라운처럼 한 발로 춤출 수 있을 거라고 말한 일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막 교회에서 나왔을 뿐인데 나는 또다시 쇼 비즈니스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음악 활동으로 트로피를 모으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의 우리의 라인업이 고정되었다.
관객을 향하여 왼쪽에서 두 번째에 나를 배정하고, 나의 옆에는 저메인, 그리고 오른쪽이 재키였다.
티토는 기타를 들고 오른쪽에 자리잡고, 그 옆이 말론이다.
재키는 그 무렵 점점 키가 자라서, 말론이나 나보다 키가 더 컸다.
우리는 그 라인업으로 잇달아콘테스트에 출전했는데, 이것이 잘 되어 갔다.
우리가 만난 다른 그룹 중에는 일부 분열을 일으켜 해산하는 팀도 있었지만,
우리는 더욱도 연마하여 경험을 쌓아 나갔던 것이다.
정기적으로 탤런트 쇼를 보러 왔던 게리 사람들도 우리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톱이 되어 그들을 놀라게 해 주려고 하였다.
우리의 연주로 지루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변화해 가는 것은 늘 좋은일이고 또한 그것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10분 동안에 두 곡을 불러 아마추어 나이트나탤런트 쇼에서 이기려면,
90분의 콘서트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힘이 든다.
실수할 여지는 없기 때문에,
12곡이나 15곡을 노래하는 사치스런 무대를 소화하기 보다는 한두 곡을 집중해서 노래하는 것이
자기를 깡그리 연소시킬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런 탤런트 쇼를 소화시켜 나가는 것이 프로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한두 곡을 노래하기 위하여 몇 백 마일이나 차를 몰고 가며,
그 지방에 탤런트가 아니라고 해서 관객이 우리에게
반감을 갖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가는 길 내내 빌기도 하였다.
**드릴 팀에서 코미디언,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싱어와 댄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대와 장르의 사람들과 겨루었다.
우리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 놓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어서 옷도 신발도 머리모양도 모조리
아버지의 계획대로 하여야만 했다.
우리는 정말 놀랄 만큼 프로로 보였다.
이렇게 모든 계획을 단단히 세우고 우리가 리허설한 대로 곡을 연주하면 상은 저절로 굴러들어왔다.
그 지방 악단이 출전하고 있고 응원단까지 있던 월레스 하이 같은 지역에서 실시된 콘테스트에서,
그 지방 출전 팀에게 우리가 도전했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 지방의 악단에는 언제나 그 지방의 팬들이 있으므로,
우리의 세력권에서 남의 세력권으로 뛰어들어간 우리에겐 대단히 힘겨운 싸움이었다.
사회자가 평가의 박수를 요구하고 머리 위로 손을 든 순간,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관객들에게 더 감동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연주자로서 저메인, 티토, 그리고 우리들 나머지도 지독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매니저인 아버지는 만약 연주중에 연주자가 시작을 잘못하거나 음을 빼먹으면,
제임스 브라운이라도 그것만으로 노래할 정열을 잃어 버릴테니까 말이다라고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리드 싱어로서 다른 누구보다도 정신적인 의미이든 육체적인 의미이든
쉴 밤 따위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밤에 무대에 섰던 일은 지금도기억하고 있다.
그런 때는 신경을 집중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형들과 내가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설사 자고 있더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순서에 무사히 노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때는 관객 속에 알고 있는 사람이나 사회자를 발견하는 일이 없도록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하였다.
안면이 있는 사람은 어린 연주자의 마음을 혼란시켰으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라디오에서 들어 알고 있는 곡이나, 아버지가 알고 있던,
이미 클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곡을 연주했다. 팬들은 곡을 잘 알고 있고,
게다가 어떤 사운드인가 하는 것까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실수하면 금세 들통이 난다.
편곡을 바꾸려고 하면 오리지널보다 훨씬 좋게 소리를 내야만 했다.
템프테이션즈의 ˙『마이 컬(My Girl)』이란 노래를 우리의 편곡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여덟 살 때,
전도시 규모의 탤런트 쇼에서 우승했다.
콘테스트는 루스벨트 고등학교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열렸다.
저메인의 베이스로 시작하여 티토의 기타가 그것에 호응하고,
우리 다섯명의 노래와 코러스가 화음을 이루자 관개들은 그 곡이 끝날 때까지 모두 기립하였다.
말론과 재키가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안, 저메인과 나는 번갈아 노래를 부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최고의 기분이었으므로,
그 때까지 받은 것 중에서도 가장 큰 그날의 트로피를 공처럼 서로 패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트로피를 마치 아기처럼 소중하게 앞 좌석에 놓고,
"오늘 밤처럼 연주하면 누구라도 너희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을게다"
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1965년, 템프테이션즈의 대 히트곡 게리 시의 챔피언이 되고 나서 그 다음의 목표는 시카고였다.
시카고는 안정된 일을 제공해 주는 지역이었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것이 멀리 몇 백 마일 떨어진 곳까지도 닿는다.
우리는 진지하게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악단은 ¨머디 워터즈와 하울린 울프 따위의 시카고 사운드를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신축성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우리와 같은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밝고 멋진 사운드가 흥미를 끌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동년배에서 그처럼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적었기 때문에 우리는 운이 좋았다.
실제로 그러한 60년대의 사운드는 베테랑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저급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음악가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그는 훌륭한 노래를 분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게리 출신의 너희들과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스파니엘즈라는 두윕 그룹을 보았는데, 그건 최고였어" 라고까지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미러클즈의 스모키 로빈슨이 『트랙스 오브 마이 티어스(Tracks of My Tears)』나
『우, 베이비, 베이비(Ooo, Baby, Baby)』를 불렀을 때,
그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둘 다 시카고를 연고지로 활동했던 블루스 아티스트 60년대 사운드 덕택으로,
시카고는 음악적으로 뒤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커티스 메이필드가 있던 임프레션즈, 제리 버틀러, 메이저 랜스, 타이론 데이비스 따위의
위대한 가수들이 우리가 연주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시내의 도처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아버지는 공장에서 파트 타임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이외에는
풀 타임으로 우리의 매니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방침의 결정에는 다소 허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식들을 뮤직 비즈니스에 넣기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사람을
아버지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를 게리의 나이트클럽인 마스터 러키즈에 정기적으로 출연할 수 있도록
계약하고 왔다고 아버지가 말했을 때도 어머니는 별로 감동한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잇달아 늘어나고 있던 아마추어 콘테스트에 도전하기 위하여,
아무래도 시카고와 다른 곳으로 가서 주말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러한 여행 비용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스터 러키즈의 일이 있었기때문에 그럭저럭꾸려나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좋은 평가를 받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고,
또한 상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은 매우 기뻐했지만,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나의 나이 때문에 나에 대해서 걱정했던 것 같다.
"아홉 살의 아이에겐 아주 힘든 생활이잖아요"
라고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쳐다보면서 말했다.
*노래, 춤, 코미디 등으로 엮은 오락쇼
**아직 훈련 단계에 있는 팀
형들과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지만,
나이트 클럽의 관객들은 루스벨트 고등학교 근처에서 열렸던 쇼의 관객들과는 달랐다.
우리는 형편없는 코미디언과 디너 전의 오르간주자와 스트리퍼들 사이에 끼여 연주했던 것이다.
교육에 관해서, 분명히 어머니는 내가 나쁜 사람들과 함께 살아,
원칙대로라면 더 나이가 들 때까지 알지 않는 것이 좋은 것까지 배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스트리퍼들을 흘끗 보았다고 해서 딱한 상태가 될 만큼 내가 흥미를 느낄 리가 없다.
겨우 아홉 살인데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살아가기엔 무시무시한 곳이었으므로,
빨리 연주 여행을 떠나 이런 생활과는 깨끗이 작별하는 거야라고 우리는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미스터 러키즈에 출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생전 처음으로 하룻밤에 5센트씩 받고,
1주일에 6일간을 꼬빡 쇼를 해야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아버지가 7일째의 밤에 게리 이외에서의 일을 얻어 주면 거기에도 갔던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였는데, 바의 관객들은 우리 에게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임스 브라운과 샘 & 데이브를 좋아했고,
게다가 우리는 술과 안주와 함께 무료로 나오는 특별 봉사품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우리를 보자 깜짝 놀라 환성을 질렀다.
조 텍스의 『스키니 레그즈 앤드 올(Skinny Legs and All)』 따위 관객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 곡이 시작되면 도중에 나는 객석으로 들어가서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 여자의 스커트를 젖히고 바닥을 찾는 것이다.
내가 종종 걸음으로 뛰어다니면 모두 돈을 던져주므로, 내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그 전의 곡으로 바닥에 던져졌던 달러와 동전을 긁어보아 자켓의 주머니에 밀어 넣곤 하였다.
나는 탤런트 쇼에서 관객이란 것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을 때도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언제라도 가서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 그저 할 뿐이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모두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그 무렵, 우리가 일하고 있던 나이트클럽에서 스트리퍼가 있었던 곳은 한 군데만은 아니었다.
나는 곧잘 시카고의 나이트클럽 무대 옆에 서서 메리 로즈라고 하는 여자를 지켜보곤 하였다.
나는 틀림없이 아홉 살이나 열 살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옷을 벗어 나가다가 팬티까지 벗으면 그것을 관객을 향해 던지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팬티를 주워올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야호하고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형들과 나는 이것을 바라보며 구경을 했지만,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연주로 나이트클럽을 순회하도 보면 그런 일에 많이 부딪쳤다.
어떤 장소에서는 가수들의 분장실 벽에 구명이 뚫려 있고,
또한 그 벽의 저쪽이 여자용 화장실인 경우도 있었다. 그 구멍으로 속을 들여다볼 수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의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런 클럽에 나와 있던 남자들은 난잡하여 여자용 화장실에 구멍을 뚫는 따위의 일을 늘 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나와 형들은 그 구멍을 들여다보러 온 사람들과 싸웠다.
"비키라구, 이번은 내 차례야!" 그 장소를 확보하기 위하여 서로 밀치락 달치락했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뉴욕의 아폴로 극장에서 연주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상연물을 본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꽤 많은 스트리퍼를 보아 왔지만,
그날 밤은 화려한 속눈썹과 긴 머리를 가진 소녀가 나와서 쇼를 시작했다.
그녀는 훌륭한 연기로 관객을 압도했다.
쇼가 끝났을 때 별안간 그녀는 가발을 벗고 브래지어 속에서 두 개의 귤을 꺼냈다.
사실은 화장 밑은 건장한 남자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를 몹시도 놀라게 했다.
어린이에 불과했던 나는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극장의 관객들은 모두 그 쇼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으로,
장내가 떠나가라고 박수를 치면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무대 옆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는 정말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나는 어렸을 때 꽤 많은 교육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많이 말이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다른 면에 어른으로서 신경을 집중하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시카고의 클럽에서 성공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의 일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그때까지 들어 본 적도 없는 곡만 들어 있는 테이프를 집에 가져왔다.
우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연주하는 데 익숙해 있었으므로,
몇 개의 기타 코드를 배경으로 별로 노래도 잘 못 부르는 남자가 노래하는 곡을
아버지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거는 것이 이상했다.
아버지는 테이프에 들어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은 가수가 아니고
게리에서 녹음 스튜디오를 열고 있는 가요곡 작사자라고 말했다.
이름은 키스씨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의 곡을 취입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판단하는데
1주일의 연습 기간을 주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흥분했다.
어떤 음반이라도 우리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우리는 보통은 신곡에 맞추어서 하는 춤의 연습은 무시하고 오로지 그 곡에 매달렸다.
우리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곡을 연습하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실망감을 감추고 우리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우리는 프로였다.
이제 그 곡에 관해서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 오케이가 되자, 아버지는 우리의 연주를 테이프에 담았다.
물론 몇 번인가 시작을 잘못하기도 하고 몇 번의 펩토크를 시도해 보고 나서였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이지나 키스씨가 우리가 만든 테이프가 마음에 들었는지 걱정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우리의 최초의 레코딩 세션 용으로 그의 노래를 여러 곡 가지고 온 것이다.
키스씨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좋아하는 공장 노동자였는데,
그는 아저지 이상으로 레코딩이나 음악 비즈니스에 관계하고 있었다.
그의 스튜디오와 레코드 라벨은 스틸타운이라 불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키스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흥분하고 있었던 것을 역력히 알 수 있다.
그의 스튜디오는 번화가에 있어 우리는 토요일 아침 일찍,
내가 그 무렵에 아주 좋아했던 프로그램인 「더로드러너쇼(The Road Runner Show)」가 시작되기 전에
거기로 갔다. 키스씨는 현관에서 우리를 맞이하여 스튜디오를 열고,
여러 가지 장치가 놓여 있는 유리로 칸막이한 작은 방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제각기 어떤 일을 하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적어도 이 스튜디오에서는 녹음기를 보고 몸을 구부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목의 중간까지 오는 커다란 금속제 헤드폰을 끼고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형들이 악기를 어디에 연결하고 서면 되는가 찾고 있는데,
백코러스의 가수들과 혼 섹션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우리 다음으로 녹음하기로 되어 있어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이윽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녹음하기 위하여 스튜디오에 온 것임을 알았을 때 기뻐서 깜짝 놀랐다.
우리는 아버지 쪽을 보았는데 아버지는 전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승낙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아버지를 놀라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부스 속에서 지도해 주는 키스씨의 말을 듣도록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대로 하면 저절로 레코드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에 우리는 키스씨의 첫 곡의 녹음을 끝냈다.
백 코러스와 혼 섹션 중의 몇 사람은 녹음의 경험이 없어서 고생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겐 프로의 매니저가 딸려 있지 않았고,
우리처럼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데 익숙해 있지도 않았다.
우리를 완벽한 프로로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는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를 깨닫는 것은 이런 때이다.
우리는 그 후 몇 번인가 토요일마다 그의 스튜디오에 가서, 리허설해 둔 곡을 녹음하고,
그 때마다 키스씨의 신곡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어느 토요일에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연주하려고 스튜디오에 기타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가 우리와 함께 녹음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레코드가 복제되자 키스씨는 각 모임의 연주 사이와 쇼 뒤에 팔 수 있도록 몇 장의 음반을 우리에게 주었다.
큰 그룹이라면 그런 일은 안 하겠지만, 누구라도 어딘가로부터 시작해야만 했고,
그 당시로서는 자기네 그룹의 이름이 인쇄된 레코드가 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 스틸타운에서 나온 첫 번째 싱글인 『빅 보이(Big Boy)』에는
솜씨가 뛰어난 베이스 라인이 짜여 넣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은 소년에 대해서 노래한 그런대로 좋은 곡이었다.
물론, 그 곡의 이미지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 아홉 살의 말라빠진 소년이 노래하는 모양을 상상해 보라.
이제 더 이상 동화는 듣고 싶지 않다는 가사가 나오지만,
나는 그 노래에 나오는 대부분의 가사의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어렸다.
나는 주어진 것을 그저 그대로 노래했을 뿐이었다.
뇌살적인 베이스 라인이 들어간 그 레코드가 게리의 라디오 국에서 방송되기 시작하자
우리는 그 지방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레코드를 만든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믿게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스틸타운에서 최초의 레코드를 낸 후,
우리는 시카고에서 열리는 모든 대규모의 탤런트 쇼에 표적을 맞추기 시작했다.
대개 다른 출연자들은 나를 만나면 나를 죽 훑어보곤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우리 뒤에 출연한 사람들은 특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느 날, 재키는 누군가에게서 세계에서 제일 우스운 조크를 들은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깔깔거리고 웃기만 했다. 이것은 쇼전에는 좋은 조짐이라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재키가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에게로 가서 한마디 했다.
한데 재키가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금세 아버지까지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그 조크를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대대적으로 선전된 그룹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재키가 엿들은 거라고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밤은 잭슨 5의 녀석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해야지, 저 난쟁이도 있으니까 말이야"
라고 한 사나이가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상처를 입고 처음에는 마음이 뒤집혔다. 그들은 야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의 키가 제일 작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다른 형들도 모두 금세 깔깔거리고 웃어댔으니 말이다.
형들은 나를 비웃고 있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설명해 주었다.
저 그룹의 패거리들은 너를 「오즈의 마법사」속에 나오는 먼치킨즈의 한 사람처럼,
아이를 가장하고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실없는 소리를 한 것에 불과하니까
더 긍지를 가져도 좋다고 아버지는 말해 주었다.
게리에서 우리에게 슬픔을 주었던 이웃의 개구쟁이들이 하던 말고 같은 말을
저런 구변 좋은 사나이들에게서 듣다니, 너희들이 시카고를 제패하고 있다는 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우리에겐 또 다른 계약도 있었다. 몇 군데의 깔끔한 시카고의 클럽에서 연주한 후,
아버지는 로열 극장에서 실시되는 아마추어 나이트에 우리를 응모시켰다.
B.B. 킹이 그의 유명한 실황 앨범을 녹음한 밤에
아버지는 그 무대를 보러 *리걸 극장으로 갔다. 몇 해 전인가 아버지가 티토에게 그 빨간 기타를 주었을 때,
B.B.킹의 **루실처럼 너의 기타에 붙일 여자의 이름을 생각해 보면 어떻겠니
하고 우리는 티토를 놀려 준 일이 있었다.
* 뉴욕의 아폴로 극장과 쌍벽을 이루는 시카고의 유명한 극장.
** B.B.킹이 자기가 애용하는 기타에 붙인 이름.
우리는 매번 보러 오는 사람들을 사로잡으려고 매주 다른 곡을 연주하여 3주 연속으로 그 쇼에서 이겼다.
우리가 매주 나오는 것은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니냐고 불평하는 참가자도 있었지만,
그들도 같은 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추어 나이트를 세 번 연속해서 이기면,
바에서 몇 십 명의 관객을 상대로 하고 있었을 때와는 달리,
수천 명의 관객이 들어온 쇼에 초대되어 출연료도 받을 수 있다는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얻었다. 그날 밤의 쇼는
글래디즈 나이트 앤드 더 팝스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는데,
그 무렵까지 아무도 몰랐던 신곡
『아이 허드 잇 스루 더 그레이프바인(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으로 그 무대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도취의 밤이었다.
시카고 이후에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만 하는 대규모의 아마추어 쇼가 있었다.
뉴욕의 아폴로 극장이다. 아폴로 극장에서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행운에 불과한 것이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많은 시카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폴로 극장을 그 이상의 것으로 보고 있었다.
뉴욕에는 시카고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고,
게다가 시카고보다 많은 레코드 관계자와 음악인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만약에 뉴욕에서 해 나갈 수 있다면 아무 데서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폴로 극장에서 이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예선에도 나가지 않았지만,
시카고의 사람이 우리에 관한 일종의 스카우트 리포트와 같은 것을 뉴욕에 보내 주고 있고
평판도 꽤 좋았기 때문에 아폴로 극장은 우리에게 *「슈퍼도그」의 결승부터 참가시켜 주었다.
그때까지는, 아버지와 친해진 **밴쿠버즈의 멤버인 보비 테일러뿐만 아니라 글래디즈 나이트도
우리에게 모타운에 오지 않겠느냐고 이미 교섭이 들어와 있었다.
모타운의 오디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것은 장차의 일이라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말했었다.
* 아폴로 극장에서 하고 있었던 아마추어 아티스트의 탤런트 콘테스트
** 모타운 소속의 보컬 그룹
우리는 가이드가 딸린 시내 관광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 일찍이 125번가에 있는 아폴로 극장에 닿았다.
우리는 극장 안을 걸어다니며, 거기에 출연했던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을 포함한 스타들의 사진을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매니저가 우리를 분장실로 데리고 간 데서 그 관광은 끝나 버렸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사진이 두 벽에 장식되어 있는 것을 안 것이다.
[치틀린 서키트]에서 요금까지 지불하고 다른 프로에 보조 출연을 하는 동안,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스타들의 움직임을 주위깊게 관찰했다.
스타들의 발과 팔장을 끼는 방법과 마이크를 잡는 방법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어째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뜻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무대의 옆에서 재임스 브라운을 보고, 나는 하나하나의 스텝과 신음하는 듯한 소리와 스핀과 턴을 배웠다.
그의 공연은 보고 있는 사람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털구멍에서 불이 나올 정도로 그의 몸 전체에서 스며나오는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보고있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땀방울 하나하나를 느끼고 그가 하려고 하는것을 알아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같은 공연을 하는 사람을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다. 정말로 믿기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면 나는 거기에 나를 겹쳐 보았다.
제임스 브라운, 제키 윌슨, 샘&데이브,오제이즈-그들은 모두 관객을 흥분시키곤 했었다.
나는 아마도 다른 누구에서 보다도 또는 어떤일에서 보다도
재키 윌슨을 관찰하는 것에서 많은것을 배운것 같다.
이렇게 배운것은 모두 내가 받은 교육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곧잘 무대 뒤에 서서, 커튼 뒤에서 연주를 끝낸 사람들이 땀에 흠뻑 젖어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곤 하였다. 나는 외경의 눈초리로 그들이 지나 가는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검은 에나멜 구두를 갖는 것만을 꿈꾸게 되었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 맞는 에나멜 구두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슬픔에 잠긴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검은 에나멜 구두를 구하려고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찾아 다니자 가게의 사람들은
"우리가게에선 그렇게 작은 것은 만들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꼭 그 윤이 나서 반짝거리고,
조명이 비치면 빨강과 오렌지색으로 변하는 무대화 처럼 보이는 구두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퍽 슬퍼졌다.
아, 얼마나 나는 저 제키 윌슨이 신고 있던 에나멜 구두를 갖고 싶어 했는지!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무대 뒤에서는 혼자였다.
형들이 위층에서 무언가를 먹고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무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먼지투성이에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커튼을 붙잡고 쇼를 지켜 보았다.
스텝과 움직임과 트위스트와 턴과 그라인드와 감정과
그리고 조명의 움직임을 정말 남김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공부요 기분전환이기도 하였다. 자유시간에는 언제나 나는 무대 옆에 있었다.
아버지도 형들도 다른 음악인 들도 어디에 가면 나를 발견할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나를 놀려 대려고 했지만,
나는 그때 보고 있던 무대나 또는 방금 막 보았던 무대를 기억하는데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었다.
나는 그 무렵의 극장은 모조리 기억 하고 있다.
리걸. 업타운, 아폴로 따위, 너무 많아서 이름을 들수 없다.
이런 극장에서는 신화처럼 굉장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배출 되었다.
이세상에서 최고의 교육이란 그런 위대한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무대 옆에 서서 이 눈으로 보며 익혀 온 것은 남에게 가르칠수 있는것은 아니다.
예컨데, 스프링스틴과 U2와 같은 음악인들은 거리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는것 같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연예인이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무대로 부터 익힌 것이다.
'somethin''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r is back.! (6) | 2009.07.10 |
---|---|
Yves Saint Laurent 2010 Spring Collection Video (2) | 2009.06.28 |
Hajime Sorayama x Sixpack T-Shirts (7) | 2009.06.24 |
FUCT SSDD 2009 Summer T-Shirts (1) | 2009.06.08 |
Engineered Garments 2009 Fall/Winter Preview (6) | 2009.05.29 |